묵개선생의 파주이야기<6> 감악산은 아버지, 파평산은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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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산 이야기]
감악산은 아버지, 파평산은 어머니
문산에서 적성 방향으로 가다보면 파평이라는 지역이 나옵니다. 파평은 파평산 덕분에 유명해졌습니다. 저는 한 때 파평산에 자리잡은 사찰에서 거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파평산에서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파평산에 유난히 벼락이 자주 떨어진다는 사실과, 번개가 마치 파평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는 것입니다.
파주 사람들은 감악산을 아버지 산이라 하고 파평산을 어머니 산이라고들 합니다. 마치 청계산과 관악산의 관계와 유사하죠. 파평산은 높이는 낮지만 자락이 길고 널리 퍼져있어 포근한 어머니처럼 느껴집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듯이 파주의 모든 산은 사실상 파평산에서 뻗어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파평산 줄기가 강을 만나서 길게는 오두산 까지 뻗어나갑니다. 기세등등한 감악산을 보면 마치 아버지처럼 보이는 반면, 대지를 품고 있는 파평산을 보면 온유한 모습의 어머니 같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율곡과 성혼, 정철은 바로 이 어머니와 같은 파평산 자락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조선의 사회와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이들이 바로 파평에 살았던 것입니다.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향해 시계를 돌려 볼까요?
그 옛날 파평산 주변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지금은 임진강 유역을 막아 간척을 해서 논과 밭을 조성했지만, 예전에 물길이 파평산 인근까지 흘렀을 때 그곳은 파평 윤씨 일가의 연못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이 지역에서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인근에 살던 노파가 빨래를 하러 갔다가 떠내려 오는 광주리를 잡았는데 광주리가 그 안에 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기는 양 겨드랑이 옆에 물고기 비늘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상서롭게 여긴 노파는 그 아기를 데려다 기릅니다. 그 아이가 바로 파평 운씨의 시조인 윤신달입니다
윤씨의 시조 윤신달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일대를 통치하기도 했습니다. 윤신달에게는 손자가 있었는데, 금강경을 어찌나 좋아하던지 이름을 윤금강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파평산 늘노리 쪽에 있던 집을 사찰로 개조하고 이름을 금강사라 이름지었습니다. 윤신달의 손자가 그곳에서 부처를 모시고 수행을 하던 당시에는 사찰이 크게 번성했다고 합니다.
고려의 불교사상, 금강사와 미타암
고려 현종 시절에는 왕이 사찰로 행차를 하며 음식을 공양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이 무렵에 파평산의 높은 자락에 미타사라고 하는 암자가 만들어집니다. 윤신달의 손자가 수행하던 금강사와 미타암으로 이어지는 불교사상은 고려시대의 불교 사상을 드러내는 명칭입니다.
금강은 인간이 살아있을 때 개인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고, 미타는 죽어서 가는 서방정토를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삶과 죽음을 잇는 시공간의 의미가 금강과 미타에 담겨있습니다.
파평 윤씨의 걸출한 인물, 윤관의 탄생
윤금강이 정성을 다하여 부처를 모신 후에 귀한 자손을 얻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바로 파평 윤씨의 걸출한 인물인 윤관입니다. 윤관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도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인물이 되는데, 그가 윤은입니다. 단재 신채호는 윤은의 일화를 글로 써서 남길 정도로 그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단재 신채호가 주목한 것은 묘청의 난입니다. 시인 정지상은 승려인 묘청을 국사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묘청의 난은 백수환, 김환, 이중부 등이 연루되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도참설을 신뢰하고 중시한 인물들입니다.
윤관 사망의 미스터리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대부분이 윤관의 아들인 윤은의 제자들이라는 점이죠. 금강사가 그들의 중심이었습니다. 윤은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지만 말년에는 쓸쓸하고 우울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윤관의 집안은 현재 파평면 늘노리 일대를 터전으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파평산 자락에는 윤관과 관련된 많은 일화들이 전해 내려옵니다. 전해지는 설에 따르면 윤관은 웅담리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윤관의 사망은 1111년에 있었는데 그 후 미스터리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윤은이 세상을 떠난 후에 윤씨 일가의 세력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윤관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도 후손들은 몰랐던 듯합니다.
윤관의 무덤이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600년이 훨씬 지난, 1764년 영조 40년입니다. 65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윤관의 비석 파편이 광탄면 분수리에서 발견됩니다. 윤관이 태어났을 무렵에는 북방의 국제정세가 미묘하게 돌아갈 때였습니다.
윤관의 사망에 얽힌 미스터리는 다음 시간에 풀어볼까요.
역사칼럼니스트 관인학사 강두 묵개 서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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